아래 글은 [월간 묵가(墨家) 2008.11월호]에 특별기고된 글로서 서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아야할 것으로 생각되어 수록했습니다.

               궁체 어휘의 사전적 풀이에 대한 소고        천갑녕(서예가)

  먼저 신기철, 신용철 편저 [새 우리말 큰사전(1974)]에서 "궁체"는 "한글 서체의 하나, 조선조
   ①  궁녀들의 글씨체에서 비롯했음. 선이 맑고 곧으며 아담한 것이 특징임.
   ②  한글 글씨로는 이를 정통으로 보고 있음(이 사전 풀이말은 1961년에 나온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을 참고한 것으로 보임)"이라고 나온다.

  이렇게 현재 유통되고 있는 국어사전에서는 "궁체(宮體)"라는 서체를 일반적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위의 "궁체"에 대한 풀이는 다른 국어사전에서 보다는 상당히 길고 여러 갈래로 말해 놓아 근접한 듯한 말로 느껴진다.  그러나 여느 국어사전에서처럼 아쉬운 점이 있어 위의 ①과 ②를 두고 필자의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위의 경우처럼 전문용어를 국어사전에 기댄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성이 따른다.  더욱이 요즘 세간에는 이 서체의 특징이나 중심된 부분을 제시하지 않고 근세에 나온 몇몇 국어사전 풀이에 의존해서 혼란을 가중하는 일이 있는 것 같다.  국어사전의 약식 풀이에 따라서 "궁체"를 궁녀들 "만"이 쓰는(쓰던) 글씨로 더욱 한정하여 강조하고 밀어 붙이는 식이 되고 있는데(궁체 이야기 p26~29, 갈물한글서회 50년사 김진세 글 p176~178), 이에 문제를 느끼게 된다.

  사실 역사에 남은 잘 쓴 궁체류의 글씨 수십 점을 놓고서 딱히 누가 썼는지, 남필인지 여필인지 구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대체적 정황에 기대어 추정에 의존하고 있는데 서법적으로 잘 쓴 궁체류 중에는 남필로 된 것이 상당수 있다. 김진세처럼 궁체를 "궁녀들만이" 쓰는(쓰던) 글씨로 한정한다면 역사적 자료가 다량 남겨진 현 시점에서 보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 된다.
 우리글 한글은 여성들의 생활글(사적인)에서도 많은 활용과 발전이 있은 것은 사실이지만, 세종 이후 역대의 모든 군왕, 사대부, 일반 남성학자들도 꾸준히 써 왔다.  물론 한문에 익숙한 남성들은 한문을 진서라 하고 한글을 언문 또는 언서라 하여 한문의 아래로 여겨 사용해 왔지만 어려운 한문서적을 언해한다든지 시・소설을 쓴다든지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일에 한글을 써 왔다.  남・여를 수적으로 보면 여성을 더 능가한다.
 궁중의 경우 1700년대 영・정조 시대엔 왕의 윤음(綸音)을 한문과 아울러 한글로도 기록을 한 경우가 많았다(언간의 연구, 김일근 편) 그리하여 1700년대엔 궁의 사자관원들의 한글 글씨가 매우 좋다.  정갈한 글씨를 써야 할 경우는 궁체 질서로 기록한 것이 상당수 있다.
 다시 앞 이야기를 하자면
   ①의 내용 중 "궁녀들의 글씨체에서 비롯했음"이라 했는데, 어떤 표준으로 한 말인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서법적 관점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다.  궁인 궁체의 형성이 1700년 전후라면 그 전 몇 분의 왕비인 인선・장렬・명성・인현 왕후에서 그 질서("ㅣ"모음을 주된 축으로 하는 질서)의 발판이 놓여 있었다.  궁녀들은 여기에서 그 글체를 이어서 좋은 궁인 궁체로 발돋움한 것이었기 때문에 "궁녀들의 글씨체에서 비롯했음"은 깊이 재고하지 못한 근대적 발상의 말이다.  이러함에 위 ①을 바로잡는다면 조선조[왕비들의 글씨체를 바탕하여 궁인 궁체가 탄생했음] 또는 [궁인 궁체는 왕비들의 글씨체에서 비롯했음]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②에서 "한글 글씨로는 이를 정통으로 보고 있음"도 문제 있는 말이다.

  사실 한글 역사 560여 년간 가장 많이 써 온 글씨는 '궁체'가 아니고, 정음 반포 이후의 인쇄글과 학자들이 써 왔던 중간맞춤 질서인 조화체 계통의 글씨이다.  여기에 오히려 긴 역사와 함께 적통적(嫡統的) 엄연한 질서가 존재한다.
 조화체 계통은 조선시대 판본・필기의 전체 양을 본다면 90%이상이라 할 수 있다.  궁체는 이것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조화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원사 중창 권선문(1464)・[홍무정운 역훈(1455)]에 닿는다.  그 맥락으로 사서삼경언해・불경언해・후대에 나오는 소설류 판본・1897년의 [셩경직해] 등의 글씨로 이어졌다.  이에 비추어 궁체는 조선 후기(1650~)에 나온 한글의 한 갈래로서 조화체 계통에서 나오는 훌륭한 서체의 하나일 뿐, 큰 흐름에서 보면 강의 한 지류적인 것이요, 궁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 낸 서체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이 있는데 궁체라는 어휘 풀이에서 "이를 정통으로 보고 있음"이라 함은 아무리 힘 좋은 국어사전이라도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문용어를 국어사전에 완전히 기대는 것은 문제가 따를 수 있고  국어사전에서 여러갈래로 조금씩 설명해 놓은 '궁체'라는 어휘는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닌, 전(全) 근대적인 일반적 관점의 풀이로 이해할 수 있다.  김진세는 여러 책의 글(궁체 이야기 감수, p26~29. 갈물한글서회50년사 p177~178)등에서 우리나라에서 나온 10여종의 국어사전 '궁체'풀이를 옮겨 놓은 것을 다시 옮겨서 살펴보면,
   ①  1920년 조선총독부 편 [조선어사전], 女官(여관)の 學習(학습)すろ諺文(언문)の字體(자체) - 여관이 학습하는 언문의 자체.
   ②  1938년 문세영 편[조선어사전], 궁녀들이 배우던 한글의 글씨체.
   ③  1947년 이윤재 편 [표준 조선어사전] 궁녀들이 쓰는 한글 글씨의 체.
   ④  1961년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 조선시대에 궁녀들이 쓰던 한글의 글씨체, 선이 맑고 곧으며 단정하고 아담한 점이 특징임, 한글 글씨로는 이를 정통으로 보고 있음.
   ⑤  1976년 한국어 사전 편찬회 편 [국어사전] 한글 글씨체의 하나, 중국의 한문서법의 발전에 따라 한글 제정 이후 궁중에서 발전한 한글의 독특한 글씨체임.
   ⑥  1992년 국립국어연구원 편 [표준 국어 대사전] 조선시대 궁녀들이 쓰던 한글 글씨체, 선이 맑고 곧으며 단정하고 아담한 점이 특징이다.

  위 사전들의 풀이에서 보건대 여러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김진세는 한결같이 궁체를 특히 ①과 ③의 사전풀이에 천착되고 편협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근대에 일찍이 나온 ①과 ②, ③의 경우 어느 사전보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일 뿐 그 핵심이 빠져있다.  물론 궁녀들도 학습을 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서체적 입장에서 보면 일부분적 말이 되는 것이고, 위 ⑤번의 [국어사전], 국어사전 편찬위원회 편 처럼 먼저 이 서체의 특징 설명이 들어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국어사전들은 ①의 조선총독부 편 국어사전에 많이 기대어 편집이 이루어진 것 같으나,  이 '궁체' 낱말에 대한 문제는 20세기 들어서 깊이있게 연구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함에도 김진세는 궁체를 [궁녀들만]이 쓰는(쓰던) 글씨로 더욱 한정하여 고정시키려 하고 있다.  또한 , 김진세는 최근 '갈물한글50년사'에서 북한에서 낸 사전에서도 같은 내용의 풀이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필자가 그 사전을 어렵게 확인해 본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을 옮겨보면, 북한의 [조선말 대사전(동광출판사)], [조선말사전(사회과학원 간행)]에서는 "옛날 궁궐에서 붓으로 쓰인 글씨체, 획이 가늘고 획 머리와 꼬리가 뾰족하며 예리하고 정갈하다"로 되어있다. 상당히 정확한 풀이로 보인다.
 그런데 김진세는 위에 제시한 여러 사전풀이와 같다고 호도하고 있음은 이해가 안 간다.  지난날에 쓰여서 전하는 필사체 자료들에 의하면 1800년 전후로 하여 조선말까지 궁인 궁체가 잘 쓴 점은 있으나,  궁체를 "궁녀들만이" 쓰는(쓰던) 글씨라 해서는 곤란하다.

  조선후기 250여 년 동안 지속된 궁체는, 궁녀의 경우 150여년 동안  배움고리(사승관계)로 이어진 특이한 점이 존재했지만 오랜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서 쓰였는데, 여기에는 왕비(어필?)・공주・사자관원・서사인 등이 이 글씨('ㅣ'를 주축으로 하는 질서)로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러함에, '궁체'라는 어휘풀이는 신분적 입장에서보다는 특징성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이 옳다고 보며(그런 사전풀이에 동의하며), 전문 용어를 국어사전의 간단한 풀이에 의존하여, 궁녀라는 신분적, 제한적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말한다면 궤변이 되고 만다.  궁인이 없는 지금도 궁체는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