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서예대가(시대별)

1. 위.진,남북조시대

  鍾繇 (종요; 151~230)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 ·서가(書家).
자(字) 원상(元常). 영천군 장사현(潁川郡 長社縣:河南省 長葛縣) 출생. 후한(後漢)에서 벼슬하여 상서복야(尙書僕射)에 올랐으나, 조조(曹操)와 제휴하여 위(魏)나라 건국 후에는 조조 이후로 3대를 섬겨 중용되었다.
글씨는 팔분(八分: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에 뛰어나, 호소(胡昭)와 더불어 ‘호비종수(胡肥鍾瘦)’라 일컬어졌다. 왕희지(王羲之)는 특히 그의 글씨를 존경하였다 하며 《선시표(宣示表)》《묘전병사첩(墓田丙舍帖)》
《천계직표(薦季直表)》 등이 법첩(法帖)으로 전해온다.
그 가운데 《천계직표》는 계직이라는 인물을 문제(文帝)에게 추천한 상표문(上表文)으로 왕희지보다 앞서는 고체(古體)의 해서로 씌어 있는데 후세에 만든 위작이라는 설도 있다.

  王羲之 (왕희지; 307~365)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자(字)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句)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 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부른다. 16세 때 치감(智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집안 출신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 은호(殷浩)가 북벌을 해야함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에 대한 글을 써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천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들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약초를 따는데 몰두하는 따위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 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가 남긴 최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처음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글자를 모아서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 (大唐三藏聖敎序碑)’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따위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王獻之 (왕헌지 ; 348~388)
중국 진(晉)나라의 서예가.
자 자경(子敬).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출생.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이다. 젊어서 이름을 날려 관직은 건위(建威)장군 ·오흥(吳興)태수를 거쳐 중서령(中書令)까지 역임하였다. 왕희지의 여러 아들 중에서 최연소자인 헌지가 서(書)의 천분을 가장 많이 타고났으며, 부친으로부터 서법을 이어받아 호기 있는 서풍을 완성하였다. 후세 송나라 양흔(羊欣)의 《고래능서인명(古來能書人名)》에는 “예(隸) ·고(藁:草書)에 능하다. 골세(骨勢:筆勢)는 부친에 미치지 못하나 미취(媚趣)는 부친 이상”이라고 평하였다. 부친을 대왕으로 부르는 데 대해 소왕으로 부르고, 2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으로 병칭되어 서(書)의 표준으로 받들어진다. 《중추첩(中秋帖)》 《낙신부 13행(洛神賦十三行)》 《지황탕첩(地黃湯帖)》 《송리첩(送梨帖)》 등 많은 법첩(法帖)이 전해진다.

  鄭道昭 (정도소; ?~516 )
중국 북위(北魏)의 서예가.
자(字) 희백(僖伯). 호(號) 중악선생(中岳先生).
허난성[河南省] 잉양[滎陽] 출생. 명문 출신으로, 박학다재하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 ·청주자사(靑州刺史) 따위를 역임하였고, 광주(光州:山東省 掖縣)로 부임하는 도중 그 관내 산 속의 석벽(石壁)에 수많은 시문을 새겼다. 그 작품이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청나라 때부터였다. 완원(阮元)이 그것을 탁본으로 소개하였고, 양수창(楊守敞) 등이 칭찬한 뒤로 일약 북위의 대표적 서예가로 지목되었다.
서풍은 웅대하고, 강한 필세(筆勢)와 풍부한 변화가 특징이다.
작품에 《정문공비(鄭文公碑)》 《관해동시(觀海童詩)》 《태기산명(太基山銘)》 《논경서시(論經書詩)》 따위의 비문이 있다.

 2. 당

  歐陽詢(구양순; 557~641)
중국 당(唐)나라 초의 서예가.
자(字)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 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아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는데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황보탄비(皇甫誕碑)》《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화도사비(化度寺碑)》 따위의 비와 《사사첩(史事帖)》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능서가(能書家)로서 유명하다.

  虞世南(우세남; 558~638)
자(字) 백시(伯施). 여요(餘姚:浙江省) 출생. 6조(六朝)의 진(陳)나라 때부터 글씨와 학문에 대한 재주가 알려지기 시작하여 수(隋)나라의 양제(煬帝)를 받들었으나 그리 중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 태종의 신임을 받아 홍문관 학사 ·비서감을 거쳐 638년에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되었다.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구양순(歐陽詢)·저수량(椧遂良)과 함께 당나라 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특히 해서(楷書)의 1인자로 알려져 있다. 태종은 우세남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세남에게 5절(五絶)이 있는데, 그 첫째는 덕행(德行), 둘째는 충직(忠直), 셋째는 박학(博學), 넷째는 문사(文詞), 다섯째는 서한(書翰)이다”라고 매우 칭찬하였다고 한다.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가 유명하며, 행서로는 《여남공주묘지고(汝南公主墓誌稿)》가 있다. 시에서도 당시 궁정시단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시문집 《우비감집(虞監集)》, 편저 《북당서초(北堂書鈔)》 등이 있다.

  楮遂良(저수량; 596~658 )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자(字) 등선(登善). 항저우[杭州] 첸탕[錢塘] 출생. 우세남(虞世南)·구양순(歐陽詢)과 아울러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아버지 양(亮)은 학문과 서도(書道)에 뛰어나 태종(太宗)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저수량도 조정의 부름으로 시서(侍書)가 된 뒤 충절과 엄정함으로 역시 신임이 두터웠다.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수집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으로 그 감정을 맡아보면서 그 진위(眞僞)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고종(高宗) 때 하남군공(河南郡公)에 봉해졌으나, 만년에 황제에게 직간(直諫)한 것이 노여움을 사 좌천된 지 3년 후 불우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書風)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아름답고 화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맹법사비(孟法師碑)》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따위가 있다.

  張旭(장욱 ; 생졸연대 미상)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 때(8세기 후반)의 서예가.
자(字) 백고(伯高). 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 출생.
초당(初唐)의 서예의 대가 우세남(虞世南)의 먼 친척이다. 술을 몹시 좋아하고 취흥이 오르면 필묵을 잡았으며, 때로는 머리채를 먹물에 적셔서 글씨를 쓰는 등의 취태(醉態)가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장전(張顚)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욱에게 필법(筆法)을 배운 안진경(顔眞卿)은 그의 서법(書法)이 진정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얼핏 보아서 분방하게 느껴지는 광초(狂草)에도 그 바탕에는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서법을 배운 소양을 엿볼 수 있다. 장욱이 자신의 서풍(書風)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자언첩(自言帖)》이 전해진다

  孫過庭(손과정;648 ∼703)

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字) 건례(虔禮). 진류(陳留:河南省) 출생. 벼슬은 솔부록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 이르렀다.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배워 초서를 잘 썼다. 그의 저서《서보(書譜)》는 왕희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인적 서법을 근본으로 글씨를 공부하는 방법을 논한 것으로, 특히 저자의 자필본(自筆本)으로 유명하다. 그의 진적본(眞蹟本)이라 하는 초서의 권자본(卷子本)이 청나라 조정에 전해오고, 사진으로 복제되어 있다. 그의 글씨나 논지(論旨)는 모두 왕희지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 있다. 그 밖의 진적본으로 《초서천자문(草書千字文)》 《경복전부(景福殿賦)》가 전한다.
『손과정은 자를 虔禮(건례), 富陽(부양:浙江省)人, 官은 솔부록사(率府綠事), 그의 墓誌에 의하면 40세경에 임관하였으나 참언(讒言)을 입어 물리침을 당하고 빈곤(貧困)과 병고(病苦)중에 낙양(洛陽)의 (식업리관사(植業里客舍) 속에서 몰(歿)했다』 역사의 기록은 위와 같고 서학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손과정의 서는 2왕을 배우고 임모(臨模)에 뛰어난 기량(技倆)을 가지고 있었다. 草書가 가장 所長이었고 書譜, 草書天字文, 景福殿賦 등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또 書論家요 能文家였다.』

  顔眞卿(안진경; 709~785)
안진경의 생애
안진경은 709년에 산동성(山東省) 낭야(琅耶) 임기(臨沂)에서 서예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당(618~907)289년 기간중 중기에 속하며, 26세(734년) 과거에 급제한 후 현종(713~756)대에 중요 관직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서예의 대가로서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와 함께 현종(玄宗)의 뛰어난 신하였다.
이 시기는 당대사회가 문화적으로 꽃피운 융성기이기도 하지만,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쇠락하여 가는 시기이기도 다.
현종은 말년에(71세)양귀비(38세)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여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고 급기야 지방군벌 안록산은 중원을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안록산의 난(755~763)으로 당나라는 8년 동안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현종은 장안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난은 평정되었으나 이후 지방군벌들이 각자 지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는 형국이 15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황소의 난을 계기로 당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안진경은 평원태수(平原太守)가 되었을 때(47세) 안록산의 반란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 싸워 집안에 36명의 전사자를 내면서도 꿋꿋이 의를 세운 사나이중의 사나이였다. 이후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져 그를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렀다. 북제(北齊)의 학자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이다. 뒤에 중앙에 들어가 형부상서(刑部尙書, 법무부장관)가 되어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당시 권신(權臣)의 눈 밖에 나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5년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장(叛將)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살해되었다.
안진경의 書
顔眞卿은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에 장욱을 배워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새 풍격을 이루어 왕희지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후대에 끼쳤다. 해서의 조형에 있어서 안진경은 전서와 예서의 특징을 흡수하여 그의 해서에 적용시켰다. 많은 서예가들의 해서가 큰 글씨 쓰기에는 적당치 않았는데 안진경의 해서는 오히려 큰 글씨에 더욱 그 묘한 맛을 발휘한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것으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해·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顔眞卿의 書藝時期 구분
전기 (50세 까지) : 수·당시대에 유행하던 글씨의 영향이 강하던 시기
중기 (51세부터 60세 까지): 강건하면서도 웅후한 기풍과 기세가 당당한 풍격을 이미 형성하고 있는 시기
후기 (61세 이후): 안체의 성숙기
709년 출생 편모슬하 殷氏가문(외가)에서 서학공부, 남북조 서풍 영향
734년(26세) 과거급제
743년(35세) 張旭과 만남, 새로운 서풍을 배움
752년(44세) 다보탑비(多寶塔碑)
754년(46세) 동방삭화찬비(東方朔畵贊碑)
755년(47세) 안록산의 난. 평원태수로 거병하여 평정에 나섬
758년(50세) 제질문고, 제백문고
763년(55세) 안록산의 난 평정
764년(56세) 쟁좌위고, 곽경지 묘비(郭氏家廟碑)
768년(60세) 안근례비
771년(63세)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774년(66세) 천록자서(干祿字書)
780년(72세)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자서고신첩(自書告身帖)
785년(75세) 사망

  李邕(이옹;678~747)
자(字)는 태화(泰和)이고 양주(揚州) 강도(江都)(지금의 江蘇省 蘇州)사람이다.
급군. 북해태수를 지냈기 때문에 그를 "李北海"라고 불렀다. 행서를 잘 썼으며 처음에는 왕희지를 배우다 왕헌지에게서 득력 하였고 뒤에는 옛날 습성을 탈피하여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이사훈비(李思訓碑)와 녹산사비(麓山寺碑)가 있다.

 

 

  李陽氷 (이양빙; 생졸연대 미상)
자(字는) 소온(小溫)
조군(지금의 河北省 趙縣)사람이다.
전서에 뛰어났으며 대 표작으로는 《城隍廟碑》《三墳記》가 있다.

 

 

 

懷素(회소;725~785)

중국 당(唐)나라의 서예가.
원래는 승려로, 자(字는) 장진(藏眞), 속성(俗姓)은 전씨(錢氏)이다. 창사[長沙] 출생. 일찍이 불문에 들어갔으며 어려서부터 서도를 좋아하여 연구와 수련 끝에 일가를 이루었다. 초서로는 그 당시 장욱(張旭) 다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술을 좋아해서 만취가 되면 흥에 못 이겨 붓을 종횡으로 놀려 연면체(連綿體)의 초서, 즉 광초(狂草)를 잘 썼다고 한다.
필적으로《자서첩(自敍帖)》《草書千字文》《성모첩(聖母帖)》《장진첩(藏眞帖)》 따위가 남아 있다.

 

  柳公權(유공권; 778~865)
유공권(柳公權)은 만당의 서예가로 자는 성현(誠懸)이고 경조화원(京兆華原, 지금 陝西省 耀縣) 사람이다.  송나라 주장문(朱長文)의 『속서단(續書斷)』의 기록에 의하면, 목종 때 유공권은 하주(夏州)의 서기(書記)로써 주청을 올렸는데 황제가 이를 보고 “짐이 일찍이 불당에서 그대의 작품을 보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朕嘗于佛廟見卿眞迹, 思之久矣].” 라고 말하고는 바로 우습유시서학사(右拾遺侍書學士)로 임명했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는 또한 그를 우사랑중홍문관학사(右司郞中弘文館學士)로 진급시켰다.  유공권의 서예는 제왕의 칭찬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았을 당시에 이미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한번은 문종과 학사들이 시구 잇기를 하는데 문종이, “사람들 모두가 더운 열기에 괴로워하나 나는 여름날이 길어 좋다[人皆苦炎熱, 我愛夏日長].”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댓구를 이었지만 문종은 유독 유공권의 “훈풍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함이 일어나네[薰風自南來, 殿閣生餘涼].”라라고 한 것을 칭찬했다.  그리고 글의 뜻이 모두 옳으니 전각의 벽에 쓰라고 명했다.  유공권은 성지를 받들어 붓을 잡고 한 붓에 써냈다.  글씨의 형체가 매우 커서 약 5촌이 되나 정미함이 아주 뛰어나 문종이 찬탄하며 “종요와 왕희지도 이에 더할 수 없도다[鍾王無以尙也].”라고 하며 즉시 그를 소사(少師)로 임명했다.  또 한 번은 선종의 명에 의해 그는 어전에서 해서로 ‘衛夫人傳筆法于王羲之’, 초서로 ‘謂語助者, 焉乎哉也’, 행서로 ‘永禪師眞草千字文得家法’ 등 29자를 씀에 영군용사(令軍容使)인 서문계(西門季)가 벼루를 받들고 추밀사(樞密使)인 최거원(崔巨源)에게 붓을 주도록 했다.  다 쓴 뒤에 매우 칭찬을 하며 기물과 돈을 하사했다.  이 일이 널리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배움을 구했다.  그리고 당시 대신의 가문의 비와 묘지명은 그의 글씨가 아니면 자손을 불효라고 여겼고 외국에서 조공을 바치려고 올 때도 그의 서명이 씌어진 작품을 받아가서 이는 유공권에게 구입한 글씨라고 했다.

‘심정즉필정(心正則筆正)’은 당나라 서예가 유공권의 필간(筆諫)과 관련 있는 고사이다.  당 목종은 어리석고 우둔한 황제로, 한번은 목종이 유공권에게 글씨를 쓰는 용필법에 대해 물었다.  유공권은 “마음이 바르면 필법도 바르니 가히 법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心正則筆正, 乃可爲法].”라고 대답하니 당 목종은 얼굴을 바로하고 필간임을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공권의 서예로 해서는 <현비탑비(玄秘塔碑)>․<신책군비(神策軍碑)>와 행서는 <난정시(蘭亭詩)>․<몽조첩(蒙詔帖)> 등이 가장 유명하다.  이들 작품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그의 서예는 왕희지를 근간으로 한 후에 또한 수․당의 유명 서예가의 작품을 섭렵하여 이를 융회관통하고 변화를 시도하다가 마지막에 스스로 새로운 뜻을 드러내어 뛰어난 대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은 「뢰석만경문(誄石曼卿文)」에서 “석만경의 필법은 안진경의 근과 유공권의 골이다[延年之筆, 顔筋柳骨].”라고 했다.  이때로부터 ‘안근유골(顔筋柳骨)’이란 미사여구가 생겨 세상에 널리 퍼졌다.  하지만 후세에 유공권의 글씨에 대한 평가도 다른 서예가들처럼 각자의 견해에 따라 포폄을 달리하고 있다.  명나라의 동기창은 유공권을 높이 받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공권의 글씨는 힘써 왕희지 필법을 변화시켜 <난정서>의 면목과 같게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신묘하고 기이하면서 진부한 것을 변화했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릇 사람이 글씨를 배울 때 자태로 연미함을 취하나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나는 우세남․저수량․안진경․구양순의 글씨를 열에 하나 정도 비슷하게 할 수 있다.  유공권을 배우고부터 비로소 용필의 예스럽고 담담한 곳을 깨달았으니 지금부터는 유공권의 필법을 버리고 왕희지를 따를 수 없다.
    柳尙書極力變右軍法, 蓋不欲與禊帖面目相似, 所以神奇化腐朽, 故離之耳. 凡人學書, 以姿態取媚, 鮮能解此. 余于虞世南褚顔歐, 皆曾髣髴十一. 自學柳誠懸, 方悟用筆古淡處, 自今以往, 不得舍柳法而趨右軍也.
  그러나 미불은 『해악명언(海岳名言)』에서 “유공권은 구양순을 본받았으나 심원함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추하고 괴이하게 쓴 못난 글씨의 종주가 되었다[柳公權師歐陽詢, 不及遠甚. 而爲醜怪惡扎之祖].”라고 하면서 필법은 여기서 다 사라졌다고 했다.  이러한 폄하는 전혀 옳지 않고 편파적인 논지임을 면치 못한다.

 3. 송

  蘇軾(소식; 1036~1101)
중국 북송 때의 시인.서예가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생. 자(字) 자첨(子瞻), 호(號)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신법(新法)’이 실시되자‘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서울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하고 있다.
서예는 행, 해서에 뛰어났으며, 안진경과 양응식의 법을 취하여 능히 스스로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다. 宋 4대가(소식, 황정견, 미불, 채양)중의 한사람이다.

  蔡襄(채양;1012~1067)
중국 송대(宋代)의 문인 ·서예가.
자(字) 군모(君謨). 시호(諡號) 충혜(忠惠). 풍류객으로서도 유명하다.
1030년 인종(仁宗) 때에 진사에 합격, 한림학사(翰林學士)·삼사사(三司使)·항저우지사[杭州知事] 를 지냈으며, 인종 ·영종조(英宗朝)의 명신이었다.
또한 문학적 재능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글씨에 있어서는 송대능서(宋代能書)의 필두에 거론되어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과 더불어 송나라의 4대가로 꼽힐 정도였다.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풍의 글씨를 잘 썼으나, 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배워 골력(骨力)있는 독자적 서풍을 이루었다. 진(眞:楷)·행(行)·초(草)·예(隸)의 각 체 및 비백체(飛白體)에 이르기까지 교묘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한다.
저서로 《다록(茶錄)》《여지보(茘枝譜》《채충혜공집(蔡忠惠公集)》들이 있다.

  黃庭堅(황정견; 1045~1105)
중국 송(宋)나라의 시인·화가. 서예가
자(字) 노직(魯直), 호(號) 산곡(山谷). 홍주(洪州:江西省) 분녕(分寧:修水縣) 출생.
1066년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국자감 교수(國子監敎授)를 거쳐 각지의 지방관리를 지냈다. 1086년에 비로소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하였다. 1095년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이 부활됨과 동시에, 구법당(舊法黨)인 그는 신법을 비난하였다는 죄목으로 검주(黔州:四川省 彭水縣)에 유배되었다.
1100년에 사면 복직되었으나, 1102년에 다시 무고를 당하고 의주(宜州:廣西省宜山縣)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았으며, 스승인 소식(蘇軾:東坡)과 나란히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녔으며,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강서파(江西派)의 시조로 꼽히며, 《예장황선생문집(豫章黃先生文集)》(30권)이 있다. 서(書)에서는 채양(蔡襄)·소식(蘇軾)·미불(米 )과 함께 북송(北宋)의 4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일종의 억양(抑揚)을 지녔으며, 활력있는 행초서(行草書)에 뛰어났다

  米芾(미불; 1051~1107)
중국 북송(北宋)의 서예가·화가.
자(字) 원장(元章). 호(號) 남궁(南宮)·해악(海岳).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신. 관직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박사(書畵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기행(奇行)이 심했다. 수묵화뿐만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들과 친교가 있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동파·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 4대가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그림은 동원(董源)·거연(巨然) 등의 화풍을 배웠으며, 강남의 운연(雲煙)이 어린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하여 미점법(米點法)이라는 독자적인 점묘법(點描法)을 창시하여 오진(吳鎭)·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왕몽(王蒙) 등 원말 4대가와 명(明)나라의 오파(吳派)에게 그 수법을 전했다.
아들 미우인(米友仁)에 이르러 성립된 이 일파의 화풍을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한다. 북송 말의 회화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화사(畵史)》 외에도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서사(書史)》 《보진영광집(寶晋英光集)》 《해악명언(海岳名言)》 따위의 저서가 있고, 《초서9첩(草書九帖)》 《행서3첩(行書三帖)》따위의 작품이 있다

4. 원

  趙孟頫(조맹부;1254~1322)

중국 원(元)나라의 화가 ·서예가.

자(字) 자앙(子昻). 호(號) 집현(集賢) ·송설도인(松雪道人). 시호 문민(文敏). 저장성[浙江省] 우싱현[吳興縣] 출생. 송(宋)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나라 세조(世祖)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벼슬은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榮祿大夫)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추봉되었다.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겨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서 정치·경제·시서화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다. 서예에서도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 이래로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던 서풍을 배격하고, 왕희지(王羲之)의 전형에 복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에서는 남송의 원체(院體) 화풍을 타파하고, 당·북송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화훼·죽석·인마 등에 모두 뛰어났고, 서예는 특히 해서·행서·초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그의 아내 관도승(管道昇)은 묵죽(墨竹)에 뛰어났고, 아들 옹(雍:仲穆)도 산수·화조 화가이며 서예에도 탁월하였다.
또 화우(畵友)·문인(門人)이라 할 수 있는 진선(錢選)· 진중인(陳仲仁)· 왕연(王淵) 들이 있어, 우싱파[吳興派]라는 한 파를 이루었다.
그림으로 《중강첩장도(重江疊饅圖)》 《사마도권(飼馬圖卷)》이, 글씨 유품으로는 《여중봉명본척독 (與中峰明本尺牘)》 따위가 있다.
그림은 오진(吳鎭) ·황공망(黃公望)·왕몽(王蒙)과 더불어 원대의 4대가로 손꼽힌다.

5. 명

  祝允明(축윤명;1460~1526)
중국 명대(明代)의 문인 ·서예가.
자(字) 희철(希哲). 호(號) 지지생(枝指生)·지산(枝山).장쑤성[江蘇省] 창저우[長州:지금의 소주] 출생. 1492년 거인(擧人)에 올랐으나 진사(進士)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514년 처음으로 광둥성[廣東省] 싱닝현[興寧縣] 지사가 되었으며, 가정연간(嘉靖年間) 초에 수도의 응천부통판(應天府通判)으로 전임하였다. 일찍부터 글씨로 이름을 떨쳤으며, 같은 고향의 서정경(徐禎卿)·당인(唐寅) ·문징명(文徵明) 과 함께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라는 칭호를 들었다. 특히 서도에서는 당시 명대 제1의 칭호를 들었으며, 위(魏)·진(晉)의 법첩(法帖)을 배워 해서(楷書)는 종요류(鍾繇流)의 격조높은 서풍을 자랑하였고, 단정한 초서와 광초(狂草)를 잘 썼다. 작품으로 소해(小楷)의 《출사표(出師表)》《적벽부(赤壁賦)》 들이 있다.

  文徵明(문징명;1470~1559)
중국 명나라 때의 화가 ·서예가 ·시인.
자(字) 징명(徵明) ·징중(徵仲). 호(號) 형산(衡山). 이름 벽(璧)·소주부(蘇州府). 장주(長州: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 출생. 1495년부터 1522년까지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문과 인덕이 세상에 알려져 1523년 54세 때 한림원시조(翰林院侍詔)를 제수받아 《무종실록(武宗實錄)》의 편수에 임하고, 3년 후인 1526년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시문서화(詩文書畵)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림은 동향 사람인 심주(沈周)에게 배운 외에도 곽희(郭熙)·이당(李唐)·왕몽(王蒙) 곧 원(元)나라 말기 4대가를 사숙하여 그들의 화풍을 절충한 경향이 있으나, 본령은 남종(南宗)의 산수화에 있으며 심주와 함께 남종화 중흥의 중심인물이었다. 글씨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는데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超孟 )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일족 중에는 문인·화가가 많았는데, 차남 가(嘉), 조카 백인(伯仁)이 유명하다.

  董其昌(동기창;1555~1636)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문인 ·화가 ·서예가.
자(字) 현재(玄宰). 호(號) 사백(思白)·향광(香光)·사옹(思翁). 시호 문민(文敏). 장쑤성[江蘇省] 화팅현[華亭縣] 출생. 1589년에 진사가 되고,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가 되었으나 환관의 횡포와 당쟁 때문에 사임하고, 1631년 옛 자리로 복귀하여 3년 후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사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관리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문명(文名)도 높아 시인 ·서가 ·문인화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감식(鑑識)·감장(鑑藏)·임모(臨模) 들에도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 말 제일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의 화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고 화풍이나 소론(所論)은 후세 오파(吳派) 문인화가에게 결정적 감화를 주었다. 저서인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남종화(南宗畵)를 북종화(北宗畵)보다도 더 정통적인 화풍으로 한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였다.
그림은 동원(董源) ·거연(巨然)을 스승으로 모셨고 송(宋)·원(元)의 화가들의 장점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심석전(沈石田)·문징명(文徵明) 들의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 남종화풍을 계승 발전시켜 근거를 원나라의 황공망(黃公望)에게서 찾았다.
스스로 고아수윤(古雅秀潤)이라고 부르던 화풍으로, 먹물 빛깔의 변화가 풍부하고 간명한 산수화를 많이 남겨 창작과 실제화업(實際畵業)을 화론(畵論)과 병행하여 전개하였다. 문학에도 능통하였고, 서가로서도 명대 제일이라고 불리며 형동(邢愼)과 어깨를 겨루어, 북형남동(北邢南董)이라 불린다.
서체는 왕희지(王羲之)를 주종으로 삼으면서도 글씨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구하여 당시 제일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저서로 《산수화책(山水畵刪)》 《용태집(容台集)》 등이 있다.

  張瑞圖(장서도;1570~1644 )
중국 명말(明末)의 서화가·정치가.
자 장공(長公), 호 이수(二水)·과정산인(果亭山人)·백호암(白毫菴). 푸젠성[福建省] 진장현[晋江縣] 출생. 1607년 진사에 급제, 예부시랑(禮部侍郞)·이부상서(吏部尙書)·중극전학사(中極殿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권세를 멋대로 휘두르던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아부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위충현의 실각과 함께 면직되었다. 그후로는 고향에 돌아가 선(禪)에 마음을 쏟고 시문과 서화로 우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서(書)는 유섭풍(柳葉風)의 선으로 기일(奇逸)한 서풍을 개척, 일가를 이루었고 미만종(米萬鍾)·형동(邢愼)·동기창(董其昌)과 나란히 명말의 4대가로 불린다. 그림은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원(元)의 황공망(黃公望)의 화풍을 배웠다고 전해지나, 현존 작품의 화풍은 다양하여 많은 화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黃道周(황도주 ;1585~1646 )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정치가 ·화가 ·학자.
자 유원(幼元) ·이약(螭若). 호 석재(石齋). 푸젠성[福建省] 출생.
명나라의 고급관리로서 청렴 ·엄격하기로 유명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난징[南京]에서 복왕(福王)이 옹립되자, 그를 섬겨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복왕이 청군(淸軍)에 체포된 후에는 당왕(唐王)을 받들어 무영전 대학사(武英殿大學士)로서 명나라 황실(皇室)의 회복을 위해 힘쓰며, 스스로 강남(江南)방면에 가서 청군과 싸웠으나 패하여 잡혀 죽었다.
학행(學行)이 높고, 문장 ·서화를 잘하였으며, 천문 ·역수(曆數)에 정통하였다

 

  王鐸(왕탁;1592~1652)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인 ·화가.
자(字) 각사(覺斯). 호(號) 숭초(崇樵). 시호 문안(文安). 허난성[河南省] 맹진(孟津) 출생. 1622년 진사에 합격하여 명·청 양조에 출사, 명나라에서는 대학사(大學士), 청나라에서는 예부상서가 되었다. 시문 ·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글씨에서 걸출하였다. 해서는 안진경(顔眞卿), 행·초서는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서풍을 익혔다고 하는데, 백력웅위(魄力雄衛)·분방자재(奔放自在)한 필치로 특히 초서에서는 정열·의기에 넘치는 격렬한 연면체(連綿體)의 양식을 수립하였다.

 

 

6. 청

  陳洪綬(진홍수 ;1599~1652 )
중국 명말(明末)·청초(淸初)의 인물화가·시인.
자 장후(章侯), 호 노련(老蓮). 저장성[浙江省] 주지[諸曁] 출생. 최자와 함께 남진북최(南陳北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도석미인화(道釋美人畵)·산수화·화조화를 잘 그려, 당시의 인기작가로서 그를 따르는 많은 아류를 낳았다.

 

 

  傅山(부산; 1605~1684 )
중국 청(淸)나라 초기의 문인화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출생. 자(字) 청죽(靑竹)·청주(靑主), 호(號) 색려(嗇廬)·주의도인(朱衣道人). 명나라 말기의 혼란기에는 도사(道士)를 칭하고 굴속에 살며 의술을 업으로 삼았다. 청나라가 건립되자 강희제(康熙帝)가 그를 불렀으나 극력 사양하고 낙향하자 중서사인(中書舍人)의 벼슬을 내렸다. 개성적인 묵죽(墨竹)이나 산수화를 즐겨 그렸고 서예에 특출하였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한다. 저서에 《상홍감집(霜紅龕集)》이 있다.

 

 

  鄭燮(정섭;1693~1765)
중국 청대(淸代)의 문인.
자(字) 극유(克柔), 호(號) 판교(板橋). 장쑤성[江蘇省] 싱화[興化] 출생. 시·서·화 모두 특색 있는 작풍을 보이며, 그림에서는 양저우팔괴[楊州八怪]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736년 진사에 급제하였고, 이어 한림(翰林)에 들어가 산둥성[山東省]의 판현[范縣]과 웨이현[弟縣]의 지사를 역임하였다. 웨이현 지사로 있던 1746년의 대기근 때 관의 곡창을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였는데, 1753년 기근구제에 대하여 고관에게 거역하였다 하여 면직된 다음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며 그후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의 시는 체제에 구애받음이 없었고, 글씨는 고주광초(古譜狂草)를 잘 썼다. 행해(行楷)에 전예(篆隸)를 섞었는데, 그 사이에 화법도 넣어서 해방적인 독자적 서풍을 창시하였다. 팔분(八分)에 대하여 그의 서체를 육분반서(六分半書)라 평하는 사람도 있다. 화훼목석(花卉木石)을 잘 그렸으며, 특히 뛰어난 것은 난(蘭)·죽(竹)으로서 상쾌한 느낌이 있는 작품이 많다. 〈묵죽도병풍(墨竹圖屛風)〉 〈회소자서어축(懷素自敍語軸)〉 따위의 작품과《판교시초(板橋詩褻)》《도정(道情)》들의 시문집이 있다.

  翁方綱(옹방강 ;1733~1818)
호(號) 담계(覃溪), 대흥( 大興 : 지금의 北京)사람이다.
금석학(金石學), 비판(碑版), 법첩학(法帖學)에 통달한 중국 청나라의 학자, 서예가. 1752년 진사가 된 뒤 광둥[廣東], 후베이[湖北], 산둥[山東] 등의 학정(學政)을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왔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찬수관(纂修官)을 지내고 내각학사(內閣學士)가 되었다. 서예는 당인(唐人)의 해행(楷行)과 한비(漢碑)의 예법(隸法)을 배워 유용(劉墉), 왕문치(王文治), 양동서(梁同書) 등과 함께 청나라 법첩학의 4대가로 꼽힌다.
경학(經學), 사학,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탁월한 감식력으로 많은 제발(題跋)과 비첩(碑帖)을 고증하였고, 시론(詩論)에서는 의리와 문사(文詞)의 결합을 주장한 기리설(肌理說)을 내세웠다.
주요 저서에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한석경잔자고(漢石經殘字考)》
≪초산정명고(焦山鼎銘考)》《소미재난정고(蘇米齋蘭亭考)》《복초재문집(復初齋文集)》 《석주시화(石洲詩話)》 들이 있다.
1752년 진사가 된 뒤 광둥[廣東], 후베이[湖北], 산둥[山東] 등의 학정(學政)을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왔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찬수관(纂修官)을 지내고 내각학사(內閣學士)가 되었다. 서예는 당인(唐人)의 해행(楷行)과 한비(漢碑)의 예법(隸法)을 배워 유용(劉墉), 왕문치(王文治), 양동서(梁同書) 등과 함께 청나라 법첩학의 4대가로 꼽힌다.

  鄧石如(등석여;1743~1805)
중국 청(淸)나라의 서가(書家).
이름 염(琰). 자(字) 석여(石如)·완백(頑伯). 호(號) 완백산인(完白山人). 안후이성[安徽省] 화이닝[懷寧] 출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서도(書道)와 전각(篆刻)에 전념하였다. 진(秦)·한(漢) 이래의 금석학(金石學)을 배워 강한 복고적 신서풍(新書風)을 세웠으며, 청초(淸初) 이래의 첩학(帖學)의 폐단을 일소하여 ‘비학파(碑學派)’의 선구자로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서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또 종래의 진한 전각에서 탈피하여 소전을 전각에 도입하는 등파(鄧派)의 시조로서 웅장하고 세련된 작풍(作風)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저서에 《등석여법서선집(鄧石如法書選集)》이 있다.

 

  何紹基(하소기;1799~1873)
청나라 때 학자 ·서가(書家) ·시인.
자(字) 자정(子貞). 호(號) 동주거사(東洲居士)· 원수(冬戒). 도주(道州:湖南省) 출생. 1836년(道光16) 진사(進士)에 급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편수(編修)가 되었다. 푸젠성[福建省]의 향시정고관(鄕試正考官)이 되었으며, 1855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의 시(詩)에 경도(傾倒), 시인으로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글씨는 처음에 당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을 배우다가, 후에 완원(阮元)을 스승으로 하여 금석비첩(金石碑帖)을 배워 한비(漢碑)·북비(北碑)를 연구, 한비의 전예(篆隸)를 중심으로 한 임서(臨書)에 전념하였고, 독자적인 서경(書境)을 열어 제1류의 서가(書家)가 되었다. 그의 행초서(行草書)는 특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소업(紹業)·소기(紹祺)·소경(紹京) 등 동생 모두 서(書)에 뛰어나 하씨사걸(何氏四傑)이라 불렸다.

  조지겸 趙之謙 [1829~1884]
중국 청(淸)나라의 문인 ·서화가
자 휘숙(遇叔)·익보(益甫). 호 매암(梅庵)·냉군(冷君)·비암(悲庵)·감료(憨寮)·무민(無悶).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출생. 1858년 거인(擧人)에 합격, 후에 장시성[江西省] 포양현[我陽縣]의 지사(知事)까지 지냈다. 여러 모로 예재(藝才)가 뛰어나 서화 외에 시·고문사(古文辭)·전각(篆刻)에도 솜씨를 보였다.
그림은 이선(李鉅) 등 양주계통(揚州系統)에 사숙하고, 석도(石濤:道濟)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의 화풍도 받아들였다. 화훼·목석에 뛰어났으며, 묵색이 농후한 인상주의적 필치를 구사하며, 채색도 수분을 많이 머금은 농담의 차가 난다. 글씨는 처음에 안진경(顔眞卿), 후에 북조비문(北朝碑文)을 따라 익히고, 예서는 등석여(鄧石如)를 사숙하였다. 전각은 청나라시대 굴지의 명인으로 알려졌다.

  吳昌碩(오창석;1844~1927)
중국 청나라의 서화가.
원래 이름은 준(俊)또는 준경(俊卿)이며 자(字)는 창석(昌碩) 또는 창석(倉石), 호(號)는 악려(岳廬) 또는 고철(苦鐵)이고 절강성 안길 사람이나 소주와 상해에서 살았다. 근대 이전 중국 전각의 마지막 대가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전각을 좋아하여 역대 전각의 장점을 취한 새로운 전각법을 개발하였다. 특히 석고문자(石鼓文字)를 모방한 글씨를 잘 썼으며, 30세 이후에는 전서(篆書) 필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50세가 넘어서 시작했으며, 특히 화훼화를 잘 그렸다. 화풍은 서위(徐渭)나 석도(石濤)를 모범으로 삼아 독특한 경지를 열었고, 글씨 쓰는 법으로 그림을 그려 힘찬 느낌을 준다. 소나무·대나무·매화나무의 세한삼우(歲寒三友)와 기석(奇石) 그림은 호방하면서도 참신하다.
화풍은 보기 드문 구도와 소재를 택하고 서체의 필법을 최대한 구사하여 독특한 선의 느낌을 자아낸다. 또한 중후한 필선의 화법을 창출하여 동양 회화미술사상 새로운 문인화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보(印譜)에는 〈삭고려인존(削觚廬印存)〉 〈吳昌碩印普(오창석인보)〉 따위가 있고, 서화집에는 《古鐵碎金(고철쇄금)》 등이 있다. 그림으로는 《자등도(紫藤圖)》 《벽도개화도(碧挑開華圖)》 《등화난만도(藤華爛漫圖)》(1916), 《옥란도(玉蘭圖)》 《芭蕉薔薇圖》 《牡丹木蓮圖》(19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