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禮考)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장례(葬禮) 제례(祭禮)
관·계례와 성년례
1.  고례(古禮)로 본 관례와 계례의의미
     사람이 태어나서 생을 마치는 동안 거쳐야 되는 중요 의례가 사례(四禮(冠·婚·喪·祭)이며 그 중 가장 먼저 치르게 되는 의례(儀禮)가 관례이다. 관례란 성년에 이른 남자에게 성년의 복색을 입히고 머리에 관(冠)을 씌우는 의식을 말하고, 여자는 어른의 복색과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하여 성년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축복하는 의식이다.
     옛 예서(禮書)에 의하면 "관례와 계례는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일깨우는  예(責成之禮)로 아들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아우로써 동생의 도리를 다하게 하며, 신하로써 신하의 할 일을 다하게 하고, 남보다 젊은 사람으로써 젊은이의 도리를 다하게 하는 데에 뜻이 있다"고 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정신적,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성인으로서의 책무와 도리를 다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기에 엄숙하고 복잡하게 삼가례(三加禮)를 행하였는데 평상복, 출입복, 관복으로, 차차 등위를 높여 옷을 갈아입게 함으로써 지신의 신분이 점차 높이 변화하는 것을 자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관(冠)은 머리에 쓰는 것으로 복식의 으뜸이며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冠" 字의 "冖"은 覆(덮을 복)의 뜻이고, "元" 은 "首(머리)"를 나타내고, "寸"은 법도를 나타낸다고 했다. 冠은 존비(尊卑)에 따라 종류가 다르며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천하를 통치하는데는, 禮보다 큰 것이 없고, 禮에는 옷 보다 명확한 것이 없고, 옷에는 冠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라고 했다.
     동자(童子)들은 건(巾)만 쓸 수 있고, 冠은 어른들이 머리에 쓰는 것으로 으뜸되는 옷 즉, 원복(元服)이라 표현한다.
    『예기』「冠儀(관의)」에는 "무릇 사람 되는 바는 예의이다. 머리는 신체를 대표하고 정신이 담긴 곳으로 인간에겐 더 없는 영묘처(靈妙處)이기 때문에 머리에 관을 쓰면 몸가짐이 바르게 되고 몸가짐이 바르면 행동도 바르게 되며 안색이 평정하게 되고 응대(應對)하는 말이 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冠이란 예의 출발인 까닭으로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冠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관례에서 요구되는 성인으로서의 행동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고(父子慈孝) 동생으로서 형을 공경하고(兄友弟恭)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성하며(君義臣忠) 젊은이로서 나이 드신 분을 공경하는(長慈幼敬)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것은 가족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며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2.  관례의 유래
   『예기』에 "관례와 혼례는 언제 시작 되었는지 모른다." 하고 <주자어류>에도 기원을 모른다 했다. <후한서>에는 "성인이 조수(鳥獸)를 보니 새에는 볏이 있고 짐승에게는 뿔이 있으며 얼굴과 양 엽과 턱에 수염이 있는 것을 보고 이에 관면(冠冕)과 갓끈을 늘어지게 하여 머리 장식을 하였다." 고 되어있다.
     새와 짐승은 어린 것에는 볏이나 뿔이 없으나 성장하여 어미를 떠나 홀로 자립할 수 있을 때 쯤에 볏과 뿔이 생겨 의젓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조수(鳥獸)의 성장 단계에서 관각(冠角)과 턱밑수염이 생기는 점에서 착안하여 인간에게도 미성년과 성년을 구분 짓는 시기에 머리에 관을 씀으로써 생명체의 성장과정의 동일성을 적용하는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3.  관례의 변천과정
     우리나라의 관례는 시작된 시기를 확실히 모른다. 신라 신문왕 6년(686)에 당나라로부터 『예기』가 들어 왔으나 관례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고려 광종 16년(956)에 '太子 伷에게 元服을 加한다' 라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이나 <고려사>에 보면 광종, 인종,명종 때까지 관례를 실시하고 그 후로는 듣지 못했다고 했다.
     조선시대 태종은 초기부터 국가 기강을 잡고자 의례(儀禮) 상정소를 설치했고, 세종 때 「오례의」를 제정하여 가례편에 왕세자와 문무관의 관례를 볼 수 있고, 성종 때 「국조오례의」, 중종 때 「문공가례」, 숙종 때 「사례편람」등에 의해 관례를 행한 것으로 본다.
     조선 말기 실학의 영향으로 관례의식이 단가례(單加禮)로 간소화 되었다. 개화기 단발령과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관례와 혼례를 동시에 행하기도 하였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관례는 점차 보기 드문 일로 되었으나, 수년 전 의성김씨 청계공파 종손의 아들이 군 입대를 앞두고 전통관례를 행하여 전국 매스컴을 타고 화제가 된 것과, 전통예절의 중요성을 선각한  사람들의 계몽에 의하여 관례를 행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 禮의 중요성도 모르는 몽매한 매국노에 의해 강제 단절되었다가 해방 후 평정을 찾은 훌륭한 가문으로부터 복행된 것이다.

 4.  관·계례의 시기
     옛 법에 남자 20세에 관례를 행하는데 그 이유는 "남자는 양(陽)이고 20은 음수(陰數)인 바, 陽이 陽다움은 陰과 합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이 말은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생식기능이 왕성한 때에 관례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남자는 20세 전에도 혼인 할 수 있으므로 15세~20세에 관례를 행하고 관례는 혼례와 무관하게 함으로써 성인의 책무를 일깨워 성인으로서의 행세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례와 계례의 거행 날짜는 의식을 행할 나이가 되는 해의 正月(1월) 중 하루를 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 해가 시작되는 처음에 어른이 되도록 하려는 데 뜻이 있었다. 계례는 계자(筓者)가 정혼을 했으면 혼례일 3일 전에 빈(賓)을 청해서 하고, 정혼하지 않고 15세에 이르면 집안의 부인이 주관해서 했다.
     현행 민법은 1973년 5월을 가정의 달, 청소년의 달이라 정하고 세 번째 주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정하고 정부나 단체에서 행사를 치르고 있으므로 만 20세가 되는 해 생일날 가정에서 빈(賓)을 모시고 행사를 하는 것이 좋고, 집체성년례는 직장, 단체, 학교 등지에서 5월 셋째 주 월요일 '성년의 날'에 하는 것이 좋다.

 별첨    고례의 관례와 계례의 절차.

예고(禮考)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장례(葬禮) 제례(祭禮)
 
筓禮 : 여자가 처음 머리를 올리고 비녀(筓·簪)를 꽂는 의식. 筓禮도 冠禮와 같이 혼인을 정하지 않아도 행하며, 여자의
         성인 됨을 알리는 뜻이다.
朱子語類 : 중국 南宋 때 朱子가 여러 문하생들과 좌담한 어록을 편집한 책으로 제자 황사의(黃士毅)가 편집(140권)
               했다.
後漢書 : 중국 역사서(紀傳體) 24史 중 하나. 劉秀가 스스로 황제에 오른 25년~魏의 曺丕가 칭제(稱帝)하여 망한 22년
            까지 後漢의 역사를 기록했다. 남조(南朝) 宋나라 范曄(398~446)이 지었다.
禮記 : 유가 오경(五經 : 詩經, 書經, 易經, 春秋, 禮記)중 하나로 공자(BC551~475)가 편찬했다고 함. 전신은 小戴禮와
         大戴禮이다.   경전에 대하여
世宗實錄 : 조선 4대왕인 세종의 治政(1418~1450)을 기록함. 163권 154책. 원명은 <세종장헌대왕실록>으로 1454
               년 완성.
五禮儀 : 고려 예종 때 국가의례를 5가지(家禮, 吉禮, 軍禮, 賓禮, 凶禮) 범주로 나누어 규정한 예서.
國朝五禮儀 : 조선 성종(1474년) 신숙주, 정척 등에 의해 편찬된 국가 의례.
文公家禮 :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朱熹(1130~1200)가 가정에서 일용하는 예절을 모은 禮書.
               <家禮 ><朱文公家禮>등으로 불린다. 주자학과 함께 고려 말기에 도입됨.
四禮便覽 : 조선 후기 문신인 李 宰(1680~1746)가 편찬한 것을 1844년(헌종10년)에 후손들의 수정과 증보를 거쳐
               증손 光正이 발행함.
高麗史 : 조선왕조가 개국 직후 새로운 왕조 창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 왕조인 고려(918~1392)의 역사를
            정리 기록함. 1451년 문종1년 완성.
斷髮令 : 일정시대인 1895년 내무대신 유길준이 미국에서 보고 와서 위생적, 편의성 등을 주창하며 단발을 주장하고
            고종과 순종이 솔선수범으로 단발을 했다. 이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년 음력 12월 5일~1906년
            12월 30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 아호는 면암(勉庵)이다.
: 관례를 주관하는 주례자로 주인의 친구나 관자(冠者)의 스승 등 학문과 덕망과 례(禮)를 아는 사람으로 한다.
冠者 : 관례를 행할 당사자.
主人 : 관례자의 친권자로 조부, 부, 큰형, 문중어른 등이 될 수 있고, 어른(직계존속)이 계시지 않은 종손이면 자신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