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禮考)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장례(葬禮) 제례(祭禮)

        제 례 ( 祭 禮 )

  제례라 함은 시조(始祖)이하 선대 선조들을 추앙(推仰)하는 여러가지 의식을 비롯하여 돌아가신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형제와 배우자 기타 친족을 추모 또는 추도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날에 혹은 사시(四時)명절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 절차를 말한다.

◎ 제 사 ( 祭 祀 )의 유래
  제사를 지내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먼 옛날 사람이 원시적인 생활을 할 때 천재지변이나 또는 사나운 맹수 등의 공격과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늘과 땅 심수(深水), 거목(巨木), 높은 산, 바다, 조상 등에게 절차를 갖추어서 빌었던 것이니 즉 제사가 발생한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연변화나 어떤 공격체나 또는 질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행하여져 온 제사는 중세와 근세에 이르러 차츰 유교적인 조상숭배의 제도로 변하여졌으나 그 대신 유교적인 번잡한 절차와 자연숭배의 미신적인 의식이 높아지므로 가정마다 연간 제사를 지내는 횟수가 무려 48회 이상이나 되었다. 제례(祭禮)는 상례(喪禮)와 마찬가지로 그 의식절차(儀式節次)가 너무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옛부터 유학자(儒學者)나 예문가(禮文家) 사이에서 갑론 을박의 논쟁이 많았을 정도였다.

◎ 제례수상(祭禮隨想)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는 말도 많고 형식 절차도 가지가지이다. 옛날에는 이 논란으로 조정 정사(政事)가 어지러워졌고 학자와 선비들이 점잖치 않게 파당을 지어 생사(生死)를 걸고 싸움질까지 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는 우리나라 사례(四禮)의 모체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리라.
  가례(家禮)에는 조석상식에 부용주(不用酒:술을 쓰지 않아도 된다)라 하였고, 퇴계(退溪)선생은 '술이 있으면 한 잔 올려도 좋다'하였고 '상식(上食)에는 서서 곡(哭)하고 절을 하지 않음은 생전에 조석으로 부모를 부를 때나 뵐 때마다 절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하였는데 초하루 보름 삭망(朔望)에는 보통 상식과 달리 잔도 올리고 재배도 하고 사신례(辭神禮)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탈상 때까지 매일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는 집이 별로 없지만 효성이 깊은 자녀들이 아직은 더러 있기에 참고로 적어둔다. 혼백(魂帛)은 비단으로 동심결(同心結)을 맺어 장례 전에 영혼이 의지할 곳으로 만들어 모시는 것인데 하관 후에 광중에 묻는 것으로 송우암(宋尤庵)은 세포(細布)로 사통오달(四通五達)로 접도록 했으나 이 역시 지금은 행해지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가주(假主)는 밤나무로 신주(神主)를 만든다. 상고시대에는 시동(尸童)이라고 7~8세된 어린이를 신위로 앉히고 제사를 지냈는데 나무로 만든 신주로 대신했고, 작금에 와서는 밤나무로 조주(造主)를 아니하고 백지(白紙)를 목주(木主)와 같이 접어서 글씨를 써서 신위(神位)로 모시는 것도 가주(假主)라 한다.
  오른편(右)이 동쪽이니 동고서비(東高西卑)라 해서 생전(生前)에는 남우여좌(男右女左)로 자리가 베풀어졌으나 사후(死後)에는 서고동비(西高東卑)로 남좌여우(男左女右)가 되니 그 이유는 일월출몰(日月出歿)이 동쪽으로부터 시작하니 양계(陽界)에는 동쪽을 머리로 하고(以東爲首) 산수지세(山水之勢)는 서쪽으로 내려가 동쪽으로 향하므로 음계(陰界)에는 이서위상(以西爲上)이다. 예문(禮文)에 조손(祖孫)이 부동장(不同杖)이라 하여 승중상(承重喪)에 증조(曾祖)가 생존하시면 상장(喪杖)을 못 짚지만 부상(父喪)에 조부(祖父)께서 생존하시면 상장을 짚을 수 있지만 다만 동행일 때는 못 짚는다.
  제반(祭飯)을 통칭(通稱) '메'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인도(印度)나라 말이다. 불교(佛敎)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불전(佛前)에 올린 밥을 메라 하였기 때문에 제사에 올리는 밥도 메라고 해서 공통어가 된 것이며, 일본에서는 밥을 메시라 하고, 쌀을 고메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말이다. 종부(宗婦)가 만일 친가부모(親家父母)의 상복을 입었으면 제사날에 임시로 옥색옷을 입으라 하였다. 고비위(考妣位:돌아가신 부모님)를 각기 단설(單設)로 해서 한 분만 제사하는 집도 있고, 합설(合設)해서 내외를 함께 지내는 집도 있으나 단제(單祭)는 예정(禮之正)이요, 합제(合祭)는 예지정(禮之情)이라 하였으니 단제(單祭)건 합제(合祭)건 모두 좋으나, 대다수가 합제(合祭)하고 있다. 동유설(東儒說)에 '묘소에 절사(節祀)는 불가(不可)하다'고 역설(力說)한 분들이 많은데, 그 답변에 '顔子使於諸候라가返國奠墓而人이라'하였으며, 춘추전국시(春秋戰國時)에도 묘제(墓祭)가 있었고, 맹자(孟子)에 '東郭播間之祭에 醉飽而歸'라 하는 말이 있으니 육국시대(六國時代)에도 있었으며, 장량(張良)의 자손이 '於穀城에 並祀黃石이라'하였으니 서한시(西漢時)에도 있었고, '漢武帝令諸將으로 賜小宇祭墳墓라'하니 자고(自古)로 묘제(墓祭)가 있었던 일이다.
  율곡(栗谷)은 말하기를 '분향(焚香)과 강신(降神)을 합해서 한번만 재배하고 참신(參神)에 모두 재배함도 무방하다'하였다. 예문(禮文)에도 ;재불분향(再不焚香)인 즉 분향을 청신(請神)이니 강신시(降神時)에 한 번만 하고 헌작시마다 분향은 못쓴다'하였다. 예론자(禮論者)들이 '선참신(先參神) 후강신(後降神)'이니 ' '선강신(先降神) 후참신(後參神)'이니 하는 이론(理論)이 있으나, 행사시(行祀時)에 감실(龕室)에서 출주(出主:신주를 내 모시는 것)할 때 감신물(龕室門)을 열고 먼저 재배한 뒤 출주(出主)하는 것을 선참신(先參神)이라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참신(參神) 재배가 없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영정(影幀:초상)에는 제사를 않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가례증해(家禮增解)에 보면 "주자(朱子)도 於長子影禎에 每致奠에 不盛設하였다"하는 문구(文句)가 있으니 영정(影禎)에도 치제무방(致祭無妨)하다. 우암(尤庵)은 "평소 좋아히던 음식을 모두 폐할 수 없으니 三년상 내에는 개고기 산채라도 무방하다"하였다. :제우부정(祭有不淨)"하니 초상이 났을 때 장사지내기 전이라면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고 (廢祭), 아기를 낳을 때 (産故)는 三日 以內면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따로 살고있을 때는 상관이 없다.
  명재(明齋)는 말하기를 시조제사(始祖祭祀)에는 사성(賜姓)관계로 성(姓)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祀(祝)文에 초헌관(初獻官)의 성명을 쓰는 것이 可하다고 하였다. 산신제(山神祭)는 반드시 제사철상(祭祀撤床)과 동시에 지내는 법이나 일강(一崗)에 누대묘소(累代墓所)가 있으면 각묘제사(各墓祭祀)를 마친 뒤에 최고위묘좌편(最高位墓左便)에 설석(設席)하고 지내라고 하였으며, 묘사(墓祀)보다 먼저 산신제(山神祭)를 올리는 것은 망발(妄發)이라 하였다. 그러나 묘소거리(墓所距離)가 멀어서 다시 제물(祭物)을 갖추어 돌아가기가 어려운 곳은 원위(元位:最高) 제사(祭祀)를 마친 직후에 올리는 것도 무방(無妨)할 것이다.
  산신제(山神祭)에 선토제(先土祭)니 후토제(後土祭)니 하는 논란이 있으므로 예문(禮文)을 이기(移記)하여 둔다.
  [朱文公家禮]에는 [祀土地按朱子大全集有四時祭大夫墓祭 祭后土則時祭 祭土地 亦禮之宜也 今擬祭儀於後]라 하였고, 사례(四禮)의 묘제의(墓祭儀)에는 [墓上每分如時祭之品更設魚肉米麪食以祭后土]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신제(山神祭)는 자기 조상의 영세(永世)를 의탁한 산신(山神)에게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또 앞으로의 수호도 부탁하는 의미가 있어서 옛부터 [先土祭·後土祭]를 논란하였을 만큼 중요한 제사이다.
  그러므로 원위산소(元位山所) 상부좌편(上部左便)에 터를 닦아 두는 것이 통례이며 그 행사(行祀)도 반드시 제주(祭主)가 올리도록 하고 다른 제관(祭官)에게 대행시켜서는 결례(缺禮)이며 또 제수도 몇 가지를 간략하게 진설함은 더욱 잘못이다. 예문(禮文)에도 [每分如時祭之品更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송동춘(宋同春)이 김사계(金沙溪)한테 "후토제(后土祭)를 묘제(墓祭) 전에 지내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까 사계(沙溪)는 "나는 우리 선조세천(先祖歲薦)의 묘제(墓祭)에 정성을 다하고 있으니 묘제후(墓祭後)에 후토제(后土祭)를 지내는 것이 옳은 줄 믿으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가 그곳에 계시니까 그렇소"라고 하였고, 또 손우(遜愚)는 말하기를 "옛부터 오사(五祀)의 예제(禮制)가 모두 그 곳 신(神)에게 먼저 지내는데 어찌 후토제(后土祭)만 다를 수가 있으며, 그리고 우리 조선(祖先)을 보호하여 주고 있는 토신(土神)이니까 묘제(墓祭)에 앞서 后土祭를 올려야 옳다"고 하였다.
  이 두가지 주장이 서로 상반되지만 여기에 그 원문(原文)을 남겨두니 참고하기 바란다.
  ※ 宋同春問於金沙溪曰祀后土如何墓祭之前沙溪曰吾爲吾親薦歲事專誠在於墓祭土神自宜後祭盖有吾親方在是神又遜愚曰古在五祀之制凡祭皆先祭於其所然後迎尸而祭之五祀尙然況后土是吾祖先托禮之主先墓而祭之. ○兩說不同竝記之以備參考
  후토제(后土祭)는 앞에서 "묘제(墓祭) 직후에 올리고 墓祭 때와 같은 제수를 쓰고, 또 제주(祭主)가 직접 올리되 분향(焚香)은 않는다 한다"의 양설(兩說)이 예서(禮書)에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后土祭小考

◎ 제사의 종류(祭祀의種類)
  제례(祭禮)가 까다로운 정도만큼 그 종류도 많다. 그 대강만을 추려 보아도 사당에서 올리는 초하루 보름의 사망제(朔望祭)를 비롯해서 각종 사당 고유제(告由祭), 정월 초하루와 추석(秋夕)의 차례(茶禮:혹은 節祀)를 비롯한 중삼(重三:三月三日), 단오(端午:五月五日), 유두(流頭:六月十五日), 중양(重陽:九月九日), 동지(冬至) 등 세속(世俗) 절사(節祀)가 있고 또 묘제(墓祭)로 한식(寒食)과 十月에 五代 이상 묘소에 올리는 세일사(歲一祀:時享)인 墓祭, 그리고 五代 以下의 기일(忌日)에 올리는 기제(忌祭)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대제(大祭)는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의 가운데 달(中月)에 올리는 시제(時祭)라 하겠다. 가례(家禮)에는 "孟月下旬之首擇仲月三旬各一日 或丁 或亥日)"이라 했고, 冬至祭始祖는 "程子曰此厥初生民之相也 冬至一陽之始 故象其類而祭之" 季秋祭禰는 "季秋成物之始 亦象其類而祭之"라 하였다. 그러나 대제(大祭)라고 하는 시제(時祭)는 오늘날 거의 올리지 않고 있다. 시제(時祭) 다음으로 중요한 제사가 기제(忌祭)인데 사대봉사(四代奉祀)가 원칙이다. 그래서 오대가 되면 사당에서 천조(遷祧)가 된다. 그러므로 기제의 대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및 배우자이다. 다만 무후한 三촌 이내의 존속동항렬 또는 비속의 친족에 대하여는 기제를 지낼 수 있다.
  기제(忌祭)는 고인의 별세한 날에 해마다 한번씩 올리는 제사로서 고인의 추억을 더듬어 별세한 그날을 길이 잊지 못하여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금기(禁忌)한다는 뜻에서 올리는 제사이며 그 날을 기일(忌日) 또는 휘일(諱日)이라고도 한다.
  기제의 봉사대상을 별세한 부모, 조부모, 증·고조부모와 배우자로 정한 것은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에 따른 생활형태로서 이 분들은 생시에 한 가족으로서 생활을 같이 해왔고 가장 친밀한 감정이 남아 있을 것이니, 조부모의 경우는 일찍 돌아가셨다 해도 아버지의 또는 할아버지의 조부모이기 때문에 가정생활에서 항상 귀에 익혀 듣게 되고 한 자족으로서의 기억이 생생하여 진심으로 그 분의 별세를 슬퍼하며 그리웁게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부모의 윗대(代)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님들이란 관념과 인식은 갖게 되나 친밀한 가족관념으로서는 다소 등한시 되기 쉽다. 또 자손이 없이 별세한 삼촌이나 숙모, 형제자매, 아들 또는 친조카들에 대하여서는 사정이 허용 된다면 기제를 지내야 한다.
  삼촌 내외분이나 형제자매, 아들 또는 친조카 등 역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가족관념으로서 정이 두터울 것이며 인정상 별세한 날을 추모하는 뜻에서 간소하게라도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친족에 대한 정의(情誼)라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의식은 어느 나라에도 다 있다.
  우리나라의 제례는 원시적인 형태로 계속하여 오다가 고려말기와 이조를 통하여 중국의 유교사상에 의해서 제대로 형식과 절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역사에 나타난 기제제도(忌祭制度)는 고려 공양왕 二년 二월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의 발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례규정에서 비롯되거니와 그에 의하면 대부(大夫) 이상의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은 三代, 六品 이상은 二代, 칠품 이하와 일반 서민들은 父母만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그 후 이조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전(禮典)편에 규정한 것을 보면 사대부(士大夫) 이상이 四代, 六品 이상이 三代, 七品 이하는 二代, 일반 서인은 부모만을 지내도록 되어있다. 그 당시는 전제군주제도로서 계급사회를 이루었기 때문에 제사의 봉사대상까지도 계급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그러나 그 당시 七品 이상의 벼슬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수는 불과 二할 미만으로서 부모만을 봉사하는 일반 서민들의 수는 국민 전체의 八할 이상을 차지하였으므로 우리나라의 민속화된 기제사(忌祭祀)의 봉사대상(奉祀對象)은 대부분이 부모 당대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부모 당대만의 기제를 지내오다가 한말(韓末) 갑오경장의 여파로 계급사회가 무너지자 너도 나도 사대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의 삼대봉사(三代奉祀)도 실은 그 근거의 바탕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한 것이고 보면 잘못이 없는 것으로 안다.

◎ 기제일(忌祭日)
  기일(忌日)은 휘일(諱日)이라고도 하며 고인이 별세한 날을 말한다. 별세(別世) 전 날을 입재일(入齋日), 별세한 날이 기일(忌日), 그 다음날이 파재일(罷齋日)이다. 대제(大祭:時祭)는 삼일재계(三日齋戒)를 하고, 묘(廟)·묘제(墓祭)에는 二日, 기제(忌祭)에는 일일재계(一日齋戒)이다. 입재일(入齋日)에는 제주(祭主)와 주부(主婦)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음주를 삼가며, 가무를 금하고 상가의 문상도 안가는 법이며,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고인의 생존시를 회상하면서 추모하는 법이다.

◎ 기제시간(忌祭時間)
  예문(禮文)에는 별세한 날 자시(子時:子正)에 제사를 지낸다고 되어있다. 궐명제(厥明祭)니 질명제(質明祭)니 한다. 궐(厥)은 기야(其也)요, 질(質)은 성야(成也)니 "厥明"하면 미명(未明)이요, "質明"하면 먼 동이 틀 무렵이다. 그러니까 자정(子正:零時)부터 인시(寅時:새벽5시)까지 날이 새기 전 새벽에 기제(忌祭)를 올리는 것이 예(禮)이다.
  신도(神道)는 음(陰)이라 하여 늦은 밤중에 활동을 하며 닭 우는 소리가 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예문(禮文)에는 없는 미신적인 헛소리이다. 날이 바뀌는 첫 새벽(子時)에 기제를 올려야 한다는 궐명행사(厥明行祀)의 예문정신은 돌아가신 날이 되면 제일 먼저 고인의 제사부터 올리는 정성을 강조한데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와 생활여견에서 볼 때 한밤중 제사는 핵가족화되어 분산거주하는 가족들의 참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음날 출근과 활동에도 지장이 많게 된다. 그래서 가정의례준칙을 보면 별세한 날 일몰 후 적당한 시간에 지내게 되어있다. 저녁 때라면 사업하는 사람이나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며 제관들이 모이기 좋은 시각이어서 도시에서는 저녁 八時·九時 사이에 행사(行祀)하는 집안이 대부분이며 또 결례도 아니라고 본다.
  종래에는 가정에 따라서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제청(祭廳)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 두어서 항상 그 장소에서 지내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허식에 불과하며 지나친 것이다.

◎ 제주 (祭主)
  제주는 고인의 장자 또는 장손이 되며, 장자 또는 장손이 없는 경우에는 차자 또는 차손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주재한다. 상처한 경우에는 남편이나 그의 자손이 제주가 되고 자손이 없이 상부(喪夫)한 경우에는 아내가 제주가 된다.
  제주(祭主)라 함은 제사를 맡아서 지내는, 즉 제사를 주제(主祭)하는 사람을 말한다.

◎ 참사자 (參祀者)
  기제사는 고인의 별세한 날을 매년 추모하는 의식으로 순수한 가족적인 행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행사에는 고인의 직계 자손과 가까운 친척들만이 참여하게 된다.
  특히 고인의 직계자손으로서 먼 타지방에 출장을 하였거나 또는 그 밖의 사정으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면 제사를 지내는 시간쯤 해서 여행지에서 묵념으로라도 고인을 추모하여야 한다.
  종래의 관습으로는 기제사 날이 되면 멀리 출타했던 사람도 반드시 집에 돌아와야 하며, 집에 있는 사람은 말을 타거나 가까운 거리라도 외출하지 않을 뿐더러 집에서 손님도 받지 않고 금기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생활여건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정일 뿐만 아니라 제사를 위해서 공무를 소홀히 하고 가계(家計)에 영향을 미치도록 한다는 것은 고인의 영혼도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 행사방법 (行祀方法)
  기제는 단설(單設)과 합설(合設)이 있는데 양위가 모두 별세하였을 경우에는 합설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행사(行祀) 방법은 고인의 내외분을 함께 모시는 것을 합설(合設)이라고 한다. 또는 그날 별세하신 한 분만을 모시는 것을 단설(單設)이라고 한다. 부부는 일신이라는 말대로 정분을 보더라도 당연히 합설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되며, 또 지금 대부분이 합설(合設)하고 있다. 종래에는 가가예문(家家禮文)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가정의례의 절차와 형식이 조금씩 달라졌던 것이다. 그 원인은 이조시대에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각 파간에 다른 파에서 하는 절차대로 따라 할 수 없다하여 그 나름대로 조금씩 바꾸어서 달리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정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봉사 방법이나 제물을 진설하는 형식이니 그러기 때문에 속담에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고 참견말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합설할 경우에는 젯상에 두 분 따로 차릴 것이 아니고 한 젯상에 메와 잔만 두분 것을 따로 올리면 된다는 예문(禮文)이 있다. 추석이나 설날같은 명절제사는 사대를 윗분부터 차례로 지내왔으나 지금은 사대를 합설하는 집안도 있다. 그러나 합설하려면 윗 어른을 왼쪽에서 차례로 모신다. 혹은 아랫분은 곡설(曲設)하여도 무방하다.

◎ 신 위 ( 神 位 )
  신위(神位)라 함은 고인의 영혼 즉 신을 모시는 곳을 말하는데 종래에는 지방으로 모셨으나 지금은 많은 가정에서 영정(사진 또는 초상화)을 모시고 지내고 있다.
  기제사의 본 뜻이 고인의 별세한 날을 추모하는 의식이라고 하였으니 그 추모하는 정을 제대로 고취시키려면 고인의 생전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사진을 모시는 것이 예법(禮法)에 없다고 하여 탓 할 것은 아니다.
  그러니 별세하신지 오래되어 사진이 없을 경우에는 지방을 쓰겠지만 생전에 사진 한 장씩은 꼭 찍어 두었다가 별세한 뒤에 상례의 영좌(靈座)나 제사의 신위로 모시도록 하였으면 한다. 옛날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철저한 유교 의식에 따라서 위호(衛護)라고 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집집마다 사당(祀堂)을 짓고 역대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고 수많은 제사를 지내야 하였으나 지금은 세상살이가 많이 달라졌으니 세속을 따르는 것도 좋겠다. 종이에 쓴 지방 보다는 사진이 훨씬 더 실감있고 그리움도 솟지 않겠는가.

◎ 지 방 ( 紙 榜 )
  제사 지낼 때에는 지방을 쓰는데, 지방이라는 것은 고인의 신위표시를 말하는 것으로서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분은 지방이 필요 없지만 그렇지 않은 분은 흰 종이 위에 작고하신 분의 호칭과 관직을 먹으로 정성껏 써서 교의 또는 제상정후면(祭床正後面) 병풍에 붙인다. 지방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一尺二寸 폭이 三寸인 바 주척일촌(周尺一寸)은 현 미터법으로 약 20cm에 해당하니까 길이가 22cm에 넓이가 6cm 정도이다. 지방(紙榜) 쓰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 지방서식(紙榜書式)

◈ 사후(死後)에는 서고동비(西考東妣)라 좌편(左便)에 고위(考位:男), 우편(右便)에 비위(妣位:女)른 쓴다.
◈ "考"는 "父"와 같은 뜻으로서 生時에는 "父"라 하고 死後에는 "考"라 하며, 사당(祀堂)에 모실 때는 "禰(니)"라고 하며,
    "妣"는 "母"와 같다. 생시에는 "母", 死後에는 "妣"라 한다.
◈ 고인(故人)에 관작(官爵)이 있으면 "學生" 대신에 관작(官爵)을 쓰고, 부인(夫人)의 호칭(呼稱)도 달라진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민주사회에서는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각자의 재량에 맡길 수 밖에 없다.
◈ 처제(妻祭)에는 자식이 있어도 부(夫:남편)가 제주(祭主)가 된다.


◎ 축 문 ( 祝 文 )
  축문이라 함은 제사를 지낼 때 고인을 추모하는 뜻을 써서 제사 올릴 때 신위에게 고하는 글을 말한다.
  축문은 깨끗한 사고지나 또는 모조지에다 붓으로 정성껏 써야한다. 그 쓰는 방법과 예문은 다음 제례축문 쓰는 법에서 별도로 예시한다.

◎ 축 판 ( 祝板 )
  축판(祝板)은 축문을 놓고 읽는 판으로써 축문과 같은 크기의 받침판을 말한다.

◎ 제 복 ( 祭服 )
  제복은 제사를 올릴 때 입는 복장으로서 도포에 갓을 써야 하나 깨끗한 평상복을 정장으로 갖추어 입으면 된다.
  평시에 입는 옷이라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 입어야 하며 양복을 입을 경우에는 와이샤츠에 넥타이를 매고 상의를 입어야 하며 햔복을 입을 경우에는 두루마기를 꼭 입어야 한다. 그 위에 도포(道袍)를 입고 유건(儒巾)을 쓰며 더욱 엄숙하게 보이며 마음도 저절로 엄숙하여진다.

◎ 행사절차 (行祀節次) ◆ 알기쉽게 참 잘된 곳이니 여기를 참조하세요.
  ① 신위봉안(神位奉安)
      고인의 신위를 제청(祭廳)에 모시는 것으로서 앞서 설명한 사진이나 지방을 젯상 후면에 모신다.
[참고]:선참신(先參神)·후강신(後降神)이냐, 선강신(先降神) 후참신(後參神)이냐.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에는 참신(參神)을 먼저 하고, 강신(降神)을 뒤에 하며 지방(紙榜)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는 강신(降神)을 먼저하고 참신(參神)을 뒤에 한다는 명문(明文)이 사례(四禮)에 있으니 이에 따라야 하며, 묘제(墓祭)만은 참신(參神)을 먼저하고 강신(降神)을 후에 한다.
  ② 모사(茅沙)
      띠(띠풀:茅) 한줌을 八촌(寸)쯤 잘라서 붉은 실로 중간을 묶고, 정결한 모래를 담은(모래가 없을 때는 술 지검이나 팥, 또는 쌀로 하여도 됨) 대접 속에 세운다. 그런데 띠와 모래를 쓰는 의미는 예문(禮文)에 이렇게 쓰여있다.
      ● 會通註曰 載茅搤束以紅絲立沙中
      ● 周禮註曰 必有茅者 謂其軆順理直柔而潔白承祀之德當如此也
      ● 尤庵曰 紅欲其文 沙欲其淨也
      ● 家禮附註 載茅八寸餘(周尺一寸若二糎)作束以紅立于盤

  ③ 축판(祝板)
      축(祝)을 놓고 읽는 판(板)으로 사례(四禮)에 그 규모(規模)가 기록되어 있다.
      ● 家禮本註 : 長一尺廣五寸(周尺)
  ④ 신주(神主)
      신주는 신주 받침틀과 신주로 구별되는데 그 규격을 예문(禮文)에 아래와 같다.
      ● 家禮本註曰 [跌方四寸二分(周尺)盤之洞底以受主身身高尺二寸博愊三寸 厚寸二分判上五分爲圓首寸之下勒前爲頷而
         判之四分居前八分居後頷下陷中長六寸 廣一寸深四分合之植於跌下齊竅其旁以通中圓徑四分竅居三寸六分之下 下居
         跌面七寸二分]

      사당(祀堂)이 없는 가정에서는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기 때문에 제사날에 백한지(白韓紙)에 붓으로 고인의 호칭(父면 顯考, 母면 顯妣)과 그분의 관직을 써서 붙이고 제사를 올리는데 그것을 지방(紙榜)이라고 한다.
  ⑤ 제수(祭羞)
      제수(祭羞)라 함은 제사에 차리는 음식물을 말한다.
      제사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정성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정성의 표시는 물질로써 가름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첫때 제수는 많은 돈을 들여서 성찬으로 차리기보다는 평상시 망인(亡人)이 즐겨하는 음식 또는 가정에서 먹는 반상음식으로 깨끗하게 차려 정성을 다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번거로운 의식 절차로 행하는 것만이 의례로 여겼던 옛날의 성현 말씀에도 "아믐을 다한 것이 제사의 근본이라 할 수 있고 물질로만 다한 것은 가장 잘못된 제사이다"라고 하였다.
      예문(禮文)에 "盡其心者 祭之本, 盡其物者 祭之末"이라 마음을 다하는 것이 제사의 근본이지 물질로만 때우려 드는 것은 잘못된 제사라고 하였다.
      또 율곡(栗谷)은 "曰果用五品 貧不能辨 則三品亦可 湯用五色(或肉 或魚 或菜 隨其所備) 而貧不能辨 則三色亦可 炙用三色(肉炙 魚炙 雉炙 或鷄炙)"이라고 말하였다.
  ⑤ 진설(陳設)
      제수진설에도 말이 많다. 여북해서"남의 제사에 곶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참견 말라"는 말이 아왔으며, "깎아놓아라 굴러간다"는 풍자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 조)棗:대추 조)를 찾아보면 "조동율서(棗東栗西)"라고 되어 있으나 예문(禮文)에는 없는 말이다.
      또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나 이것도 찾아 볼 수 없다.
      예문(禮文)에는 "조서율차(棗西栗次)"라 했을 뿐이다. 퇴계(退溪)는 "어동육서(魚東肉西)로 생동숙서(生東熟西)와 적유삼종(炙有三種:魚肉雉)이며, 어육은 천산(天産)이라 양(陽)이니 기수(奇數)요. 과곡(果穀)은 지산(地産)이라 음(陰)으로 우수(偶數)라 만약 집이 가난하여 갖추기 어려울 형편이면 음양에 맞추어 그 수를 따라 감품(減品)도 무방하다"라 하였다. 치적(雉炙)은 계적(鷄炙)으로 대용한다" 또 사계(沙溪)는 :喪禮備要의 陳設圖는 板本의 誤也"라 하였고, 퇴계(退溪)는 묘사(墓祀)에는 進饌禮가 없으나 반갱(飯羹) 不用도 무방하다고 하였지만 구봉(龜峰)은 원야례(原野禮)에도 반갱(飯羹)이 있으니 반갱을 아니 써서는 안되며, 종헌(終獻)때 계반개(啓飯蓋)하고 삽시(揷匙) 후에 부복하라고 하였다.
      진설 요령은 집사자(執事者)의 왼편이 西쪽이요 오른 편이 東쪽이다. 따라서 젯상의 앞이 南이 되고 뒤가 北이 된다. 南에는 젯상 앞 중앙에 향탁(香卓:香案)을 놓고, 그 東편에 주준상(酒樽床:술항아리나 술주전자 올려놓는 상), 西편에는 축탁(祝卓:축판을 올려놓는 상)을 놓는다. 향탁 위에는 후면 중앙에 모사(茅沙)를 놓고 그 뒷줄에 합동노서(盒東爐西)로 향합과 향로를 놓고, 주준상 위에는 강신잔반(降神盞盤), 퇴주그릇, 주전자, 술병을 놓고, 향탁 앞에 백석(拜席)이며 북면(北面) 중안에 신위(神位:紙榜)인데 고서비동(考西妣동)이다. 제상 남단이 제五行으로 과실인데 생과(生果)가 西便, 조과(造果)는 東이며, 四行이 나물(菜), 三行이 탕(湯), 二行이 적(炙), 一行이 반갱(飯羹)이다. 四行 양 끈에 "좌포우혜(左脯右醯)" 二行 양 끝에는 "좌면우병(左麵右餠)" 一行에는 "반(飯) 잔(盞) 갱(羹)시접(匙楪) 반(飯) 잔(盞) 갱(羹)이 된다. 혜(醯)는 젓갈, 초(醋)는 식초이며 포(脯)에는 문어 북어 전복 등이 있고, 적(炙)은 어적(魚炙) 욱적(肉炙) 치적(雉炙)이 있는데 치적(雉炙)은 응적(鷹炙)으로 대용한다.
      그리고 탕(湯)은 어탕(魚湯) 육탕(肉湯) 채탕(菜湯)이 있는데 제수는 살림 형편과 그때 그때 사정에 따를 것이지 수량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제수의 가지수 보다는 고인을 기리는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진 설 도 ( 陳 設 圖 )

① 진찬식(進饌式)
  먼저 실과를 조서(棗西) 율차(栗次) 이시(梨枾)의 순서로, 다음이 조과(造果)를 앞줄 右편(東)에, 그 양 끝에 포혜(脯醯), 그 다음이 채소를 셋째줄에, 다음에는 첫째줄에 잔반(盞盤)을 놓고 둘째줄에 어육(魚肉)을, 그 다음에는 면병(麵餠)을 좌우에, 그리고 반갱(飯羹)과 시접(匙楪)을 첫째줄에, 그리고 셋째줄에 탕(湯)을 놓는다. 그 원문은 이렇다.
  先進實果 次進棗果 次進脯醯 次進菜蔬 次進盞盤 次進魚肉 次進餠麵 次進飯羹 次進匙楪 次進湯 三獻時各進一炙.
② 배찬식(排饌式):排卽安置列也 漢書云相推排成列.
    배찬(排鑽)은 진설하는 제수의 배치를 말하는 것이며[백례축집(百禮祝輯)]에 보면 조율재서(棗栗在西) 시이재동(枾梨在東) 어동육서(魚東肉西) 생동숙서(生東熟西)라고 쓰여있음.

◎ 제례축문 (祭禮祝文)
  ◈ 축문에 대한 해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따르는 여러가지의 축문(祝文)과 고사(告辭)를 씀에 있어서 흔히 나오는 주요 문구(文句)를 다음에 설명해 둔다.
  ① 太歲(태세) : 제사 지내는 해의 간지(干支)
  ② 朔日(삭일) : 제사 든 달의 초하룻날 일진(日辰)
  ③ 日辰(일진) : 제사 날의 간지(干支)
      이상은 六十甲子에 따른 것인데 책력을 보면 알 수 있다.
  ④ 某官(모관) : 남자의 경우 관직이 있는 사람은 그 관명(官名)을 쓰고 없으면 學生(학생)이라 쓴다.
  ⑤ 某公(모공) : 남자의 경우 타인이 말할 때에는 본관(本貫)과 성(姓)公이라 쓰고, 자손(子孫)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에는 府君(부군)이라 쓰며 연소자에게는 이를 쓰지 않는다.
  ⑥ 某封(모봉) : 부인의 경우 옛날에는 남편이 관직에 오르면 그의 처도 따라서 품계(品階)를 얻어 호칭했으나
                        그것이 없으면 儒人(유인)이라 쓴다.
  ⑦ 某氏(모씨) 부인의 경우로서 남편에 따른 외명부(外命婦)호칭을 쓰고 그 밑에 본관 성씨를 쓴다.
  ⑧ 제주촌칭(祭主寸稱) : 제사 지내는 자손의 촌칭(寸稱)인데 초상을 당하면 졸곡(卒哭) 진에는 부상(父喪)에는
                        孤子(고자), 모상(母喪)에는 哀子(애자), 부모가 모두 안계실 때는 孤哀子(고애자)라 쓰며, 조부상
                        (祖父喪)에는 孤孫(고손), 조모상(祖母喪)에는 哀孫(애손), 조부모가 모두 안계실 때는 孤哀孫
                        (고애손)이라 쓰고, 담제(禫祭) 이후에는 부모제사에는 孝子(효자), 조부모제사에는 孝孫(효손),
                        증조부모제사에는 孝曾孫(효증손), 고조부모 제사에는 孝玄孫(효현손), 남편의 제사에는
                        (모씨), 아내의 제사에는 夫(부)라 쓴다.
  ⑨ 제위(祭位) : 제사를 받으실 당자인데 제주와의 촌수에 따라 각각 달리 쓴다. 부친은 顯考(현고), 모친은 顯妣
                        (현비), 조부는 顯祖考(현조고), 조모는 顯祖妣(현조비), 증조부는 顯曾祖考(현조고), 증조모는
                        顯曾祖妣(현증조비), 고조부는 顯高祖考(현조고), 고조모는 顯高祖妣(현고조비), 남편은 顯辟(현벽),
                        처는 亡室(망실) 또는 故室(고실)이라 쓴자. 顯子(현자)는 고인을 높이는 뜻이다.
  ⑩ 고사자 성명(告祀者 姓名) : 산소에서 토지신(土地神)에게 고사를 지낼 때 직접 제주가 아니고 타인이 지낼 때
                        에는 그 사람의 성명을 쓰고 직접 제주가 지낼 때에는 제주의 이름만 쓴다.
  ⑪ 봉사자명(奉祀者名)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이름을 쓰되 제(弟) 이하에는 쓰지 않는다.
  ⑫ 敢昭告于(감조곡우 혹은 감소고우) : 처(妻)의 제(祭)에는 敢(감)자를 삭제하고 昭告于라 하며, 弟 이하에게는
                        告于만 쓴다. 여기에서 밝혀둘 것이 있으니 "敢昭告于"라는 말은 "감히 밝혀 아뢰옵니다"하는 말
                        인데, "감조곡우"라고도 읽고 "감소고우"라고도 읽는다. 그런데 자원(字源)을 보면 "昭"를 "소"라
                        하면 "評也 昭代 著也"등의 경우이며 "光也 明也 曉也"일 경우에는 "조"라 한다. 그리고 "告"는 "告
                        上曰告 곡이요, 發下曰誥 고라"는 말이 광운(廣韻)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감소고우"로 흔히
                        읽지만 "감조곡우"가 정확한 독축(讀祝)이다.
  ⑬ 哀慕不寧(애모불녕) : 妻에게는 비도산고(悲悼酸苦) 부자승감(不自勝堪), 兄에게는 비통무이(悲痛無已) 지정
                        여하(至情如何), 弟에게는 비통외지(悲痛偎至) 정하가처(情何可處), 子에게는 비념상속(悲念相續)
                        심언여훼(心焉如燬)라 쓴다.(偎:愛也)
  ⑭ 酒果用伸虔告(주과용신건고) : 弟 이하에는 酒果用告厥由(주과용고궐유)라 쓴다.
  ⑮ 昊天罔極(호천망극) :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넓어서 헤아릴 수 없다는 뜻.
                        부모에게는 昊天罔極, 조부모 이상에게는 不勝永慕(불승영모), 남편과 아내에게는 不勝感慕(불승감
                        모) 不勝感愴(불승감창), 兄에게는 情何悲痛(정하비통), 弟 이하에게는 不自勝感(부자승감), 情何可
                        痛(정하가통)이라 쓴다.
  ⑮ 謹以(근이) : 妻와 아우 이하에는 玆以(자이)라 쓴다.
  ⑮ 伏惟(복유) : 妻와 아우 이하에게는 쓰지 않는다.
  ⑮ 尊靈(존령) : 妻와 아우 이하에게는 惟靈(유영)이라 쓴다.
  ⑮ 哀薦·祗薦(애천·지천) : 처와 아우 이하는 陳此(진차), 백숙부모(伯叔父母)에게는 薦此(천차)라 쓴다.
  ⑮ 饗(향) : 높이 받드는 문자(文字)이니 줄을 바꾸어 현자(顯字)와 함께 높이 쓴다.
  ◈ 기타 참고사항
        정월 설날이나 팔월 추석과 같은 절사(節祀)에는 축(祝)이 없고, 단작(單酌)으로 초헌(初獻)만 하며 그 밖의 절차는 기제(忌祭)와 같다. 또 묘제(墓祭)의 진설이나 절차는 기제사에 준하나 먼저 참신(參神), 후에 강신(降神)한다.
  ◈ 축문서식(祝文書式)  ※ 右에서 左로 읽음

별첨 : 傳統 祭禮에 대한 理論的 考察

예고(禮考)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장례(葬禮) 제례(祭禮)